한려수도 케이블카 정상에서 내려다본 통영항

2026. 12. 19–20 · 함께 떠나는 1박 2일

통영 풍경이
너무 아름다버서
눈물이 날라칸다

통영 일정

2026년 12월 19–20일 · 14명 · 차량 2대

첫째 날

12.19 토요일

  1. 청도 출발
  2. 통영항 · 점심

    배편에 따라 충무김밥 또는 송이복국

  3. 한산도 · 제승당

    배로 왕복 · 복귀 후 저녁 전 코스는 미정

  4. 서울삼겹살

    저녁 식사

  5. 숙소

둘째 날

12.20 일요일

  1. 숙소 출발
  2. 봉수골

    옛날생각 팥칼국수 · 부엔

  3. 청도 귀가
통영항·식당·숙소 지도통영항 여객선터미널 송이복국 서울삼겹살 숙소 지도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백석, 「통영」

통영이라고 발음하면 왠지 파란색이 스며 나오는 것 같다. 잔잔한 바람에 반짝이는 짙푸른 바다를 그대로 소리로 담아낸 것 같은 이름이다.

항구 가까이 시장과 마을이 모여 있고, 배를 타면 육지에서 바라보던 섬으로 들어간다. 높은 언덕에서는 집과 시장 너머로 바다가 보인다. 백석이 찾아온 항구와 박경리의 고향, 한산도의 수군과 봉수골의 이웃들. 이번에 찾아갈 곳과 그 주변에 남은 이야기를 담았다.

01

백석이 찾아온 통영

평안도 청년의 남쪽 여행

백석의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다. 통영에서 태어나거나 오래 살았던 시인은 아니지만, 그는 이 남쪽 항구를 여러 차례 찾아와 같은 제목의 시를 거듭 남겼다. 통영을 좋아했던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백석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 이유다.

그 여행에는 통영 출신 박경련이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백석은 1935년 친구인 소설가 허준의 혼인 축하 자리에서 그녀를 만났다고 전해지며, 이후 통영을 찾아와 시에 ‘란’이라는 이름으로 그리운 사람을 적었다. 사람들의 회고와 연구에 따라 여행의 세부 일정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 무렵의 통영과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이 시에 함께 남아 있다.

배로 반나절 걸리던 길

1936년 1월 23일 발표한 「통영」은 구마산 선창에서 배를 타고 통영으로 들어오는 물길로 시작한다. 시인이 적은 뱃길은 반나절이다. 지금처럼 목적지까지 차로 곧장 갈 수 없던 때, 통영을 찾아오는 데에는 배를 기다리고 바다를 건너는 시간이 필요했다.

시에는 전복과 해삼, 생선과 젓갈, 집집이 말리는 대구가 등장하고, 새벽 거리의 소리와 밤바다의 뱃소리도 담겨 있다. 백석은 바다의 빛깔만큼이나 항구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어떤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지에 관심을 두었다. 안내서 첫머리의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라는 문장도 그런 항구의 생활을 적은 이 시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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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통영이라는 이름

통영항의 거북선 모형
통영항의 거북선 모형사진: Junho Jung · CC BY-SA 3.0

‘통제영’에서 나온 지명

통영이라는 이름은 조선 수군을 지휘하던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나왔다.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세 지역의 수군을 통솔하던 군영을 줄여 통제영이라 불렀고, 그 이름이 오늘날 도시의 이름으로 남았다.

1604년 통제영이 지금의 통영 시가지인 두룡포로 옮겨오면서 항구는 군영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세병관과 관아가 들어서고 주변 능선을 따라 통영성이 세워졌으며, 군사와 장인, 항구에서 생업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모였다.

군영을 유지하던 손기술

군영에는 배와 무기를 만들고 고칠 사람,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할 장인들이 필요했다. 통제영 공방의 목공과 금속, 옻칠과 자개 같은 손기술은 통영 공예의 배경이 됐다. 한산도에서는 이순신이 머물던 본영을, 원도심에서는 그 뒤로 오랫동안 이어진 군영과 도시의 역사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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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배를 타야 만나는 동네

배를 타고 만나는 섬의 생활

시내에서 보던 섬도 배를 타고 들어가면 다른 모습이다. 선착장 뒤로 도로와 집이 이어지고 마을을 오가는 차들이 있다. 한산도 역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네이며, 이번 목적지는 제승당이 있는 섬의 한쪽이다. 여러 마을을 둘러보려면 별도의 이동 시간이 필요하다.

여행객이 특별한 경험으로 타는 배를 주민은 장을 보거나 병원에 가고 가족을 만나러 육지를 오갈 때 이용한다. 볼일을 마쳐도 다음 배를 기다려야 하고, 바람과 파도가 강하면 운항이 달라지기도 한다. 선착장에는 여행자의 관람 일정과 주민들의 생활 시간이 함께 걸려 있다.

배에서 보이는 어선과 양식 시설은 통영의 멸치와 굴이 시장으로 가기 전의 일터다. 육지에서는 섬에 가려 보이지 않던 해안과 마을도 물길을 따라 나타난다. 멀리서 하나의 윤곽으로 보이던 섬이 바다를 건너는 동안 여러 포구와 동네로 나뉜다.

문어포와 개미목에 전하는 이야기

한산도 지명에는 이순신의 수군과 임진왜란을 연결하는 이야기가 여럿 전한다. 문어포는 한산대첩에서 패한 일본군이 달아날 길을 물었다고 해서 ‘물을 문(問)’과 ‘말씀 어(語)’를 썼다는 유래가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2011년 주민에게 채록한 설화에도 나온다.

의항은 ‘개미목’이라고도 부른다. 잘록한 땅을 개미의 목에 빗댄 풀이에, 패한 일본군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는 이야기가 더해졌다. 이런 유래는 주민들이 전해 온 설화다. 지명이 생긴 당시를 입증하거나 이순신이 직접 작명했다는 기록으로 볼 수는 없다.

두억개·야소·창동이라는 이름

두억개에는 일본군이 크게 패해 수많은 군사가 죽었다는 전설이 붙어 있으며, ‘머리 두(頭)’와 ‘억 억(億)’으로 풀이한다. 큰 숫자는 전설 속 과장으로 읽어야 하며 실제 전사자 수를 뜻하지 않는다.

야소는 무기를 만들고 수리하던 곳, 창동은 군량 창고가 있던 곳으로 풀이되곤 한다. 다만 창동을 장이 서던 곳이라고 설명하는 주민 구술도 있어, 지명만으로 옛 시설을 확정하기는 어렵다. 배를 고치고 무기를 손질하며 곡식을 모으던 수군의 생활이 이런 이름과 함께 전해진다.

바다 위에서 보고 산 위에서 다시 보기

한산도는 한산대첩과 이순신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수군 본영이 있던 시기의 섬에는 군사와 전투선만 드나든 것이 아니었다. 물자와 식량을 실은 배가 오가고 여러 곳의 소식이 모였으며, 전투가 없는 날에도 군영을 유지하는 일은 계속됐다.

주변 섬과 물길을 끼고 있는 한산도의 자리는 배 위와 산 위에서 다르게 보인다. 첫날에는 바다를 건너 제승당에 들어가고, 둘째 날에는 미륵산 케이블카에서 섬들이 모인 바다를 내려다본다. 가까이 지나온 물길이 어느 섬 사이였는지 높은 곳에서 다시 가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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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제승당, 싸움 사이의 날들

한산도 제승당
한산도 제승당사진: Asfreeas · CC BY-SA 3.0

한산대첩 이후 수군 본영이 된 한산도

한산대첩은 1592년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의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물리친 해전이다. 배들이 학의 날개처럼 펼쳐지는 학익진으로도 알려져 있다. 한산도에 수군 본영을 둔 것은 그다음 해인 1593년으로, 전투가 벌어진 때와 군영을 옮겨온 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1593년 이순신은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수군을 지휘하는 초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됐고, 한산도는 1597년까지 수군을 지휘하는 본영이었다. 제승당은 한산대첩을 기리는 유적인 동시에, 그 뒤 이곳에서 군사를 훈련하고 물자를 마련하며 군영을 운영했던 시간을 살펴볼 수 있는 장소다.

제승당이라는 이름을 읽어보면

제승당은 ‘승리를 만들어내는 집’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원래 이 자리에는 이순신이 부하들과 작전을 의논하고 업무를 보던 운주당이 있었는데, 운주 역시 계책을 세운다는 뜻을 지닌 이름이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바다와 적의 동태를 살피고 배와 군사를 어떻게 움직일지 논의하던 건물이었다.

운주당은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탔고, 뒤에 영조 때 통제사 조경이 그 자리에 건물을 다시 세우면서 제승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정비와 복원이 이루어져 지금에 이르렀다. 따라서 현재의 건물과 이름에는 이순신이 군영을 이끌던 시기의 역사와 그 자리를 보존하려 했던 후대 사람들의 일이 함께 담겨 있다.

회의하던 곳, 바다를 살피던 곳, 활을 쏘던 곳

경내의 건물들은 비슷한 지붕과 기둥을 갖췄어도 맡은 일이 서로 달랐다. 제승당은 작전을 의논하던 자리와 이어지고, 수루는 바다를 살피는 망루이며, 한산정은 활을 쏘던 곳이다. 충무사는 이순신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군영의 생활과 장군을 기리는 일이 한 유적 안에 함께 있다.

회의에는 사람들이 모일 공간이 필요하고, 경계에는 멀리 보이는 자리가 필요하며, 활쏘기에는 표적을 향해 쏠 수 있는 거리가 필요하다. 건물의 쓰임을 알면 같은 경내에서도 자리를 달리한 이유가 보인다. 수루 밖으로 이어지는 물길과 주변 섬의 위치 역시 바다를 살피던 시설의 역할을 설명해 준다.

이순신의 생애를 큰 전투와 승전 위주로 읽으면 군영에서 보낸 나머지 날들은 지나치기 쉽다. 그러나 수군을 이끄는 동안에는 배를 고치고 무기와 식량을 점검하며, 군사들의 사정과 여러 곳에서 들어오는 소식을 살피는 일도 계속됐다. 전투가 없는 날의 준비가 다음 전투를 치를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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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박경리, 고향에 남은 이야기

딸을 키우며 소설을 쓴 박경리

박경리는 1926년 통영에서 태어나 1955년 단편 「계산」을 발표하며 소설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중 남편을 잃었고 어린 아들도 떠나보냈다. 그는 딸을 키우며 생계를 꾸리는 한편 소설을 썼다.

고향을 떠나 서울과 원주 등에서 살면서도 통영의 골목과 바다, 그곳 사람들을 작품에 거듭 썼다. 통영을 배경으로 한 『김약국의 딸들』도 그 가운데 하나다.

통영을 읽으려면 『김약국의 딸들』

『토지』의 주요 무대가 하동 평사리와 간도 등이라면, 통영 여행과 가까이 이어지는 소설은 1962년에 나온 『김약국의 딸들』이다. 통영을 배경으로 한 집안과 다섯 딸의 삶을 그리며, 가족의 몰락과 엇갈린 욕망, 시대가 바뀌는 동안의 돈과 관계를 다룬다.

작품 속 고향에는 항구의 풍경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정이 있다. 누가 누구와 혼인하고 어떤 일로 생계를 잇는지, 재산과 가족 때문에 어떤 선택을 하는지가 삶을 바꾼다. 서피랑을 비롯한 통영 골목이 박경리 문학과 함께 소개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실제 집과 길을 소설의 사건에 하나씩 대응시킬 수는 없지만, 비탈에 모인 집들과 가까운 항구가 작품을 읽을 배경이 된다.

『토지』의 집필과 완성

『토지』는 1969년 연재를 시작해 1994년 완성됐다. 한 작품을 쓰는 동안 작가의 나이와 살던 곳, 세상의 모습까지 달라졌으니, 시작한 원고를 마지막까지 이어가는 일은 오랜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연재의 시작과 완성이라는 두 날짜 사이에 매일 글을 쓰고 고치던 시간이 들어 있다.

손으로 쓴 원고에는 문장을 고친 흔적이 남는다. 오래된 국어사전은 글을 쓰며 들여다보던 물건이고, 재봉틀과 나비장은 일상의 살림에 쓰던 물건이다. 기념관에는 책을 완성하는 동안 작가가 곁에 두고 사용했던 것들이 함께 놓여 있다.

기념관에서 묘소로

박경리기념관은 2010년 산양읍에 문을 열었으며, 2026년 4월 새 단장을 마치고 재개관했다. 전시는 작가가 나고 자란 통영과 문학세계, 고향으로 돌아온 삶을 중심으로 구성됐으며, 글과 사진에 영상과 음성을 더해 작가와 작품을 소개한다.

박경리는 2008년 세상을 떠난 뒤 고향 통영에 묻혔다. 기념관 인근 언덕의 묘소는 서울과 원주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작가가 마지막으로 돌아온 자리다. 전시실에서 읽은 연보와 사진을 뒤로하고 언덕을 오르면 그 생애의 끝이 고향에 있다는 사실이 남는다.

묘소까지는 언덕길을 오가는 시간이 따로 필요하다. 이번 여행에서는 전시를 본 뒤 날씨와 아이들의 체력을 살펴 묘소 방문을 정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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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봉수골의 사람들

봉수대가 있던 산 아래, 밥을 먹던 골목

봉수골은 용화사거리에서 미륵산 용화사로 오르는 길을 따라 이어지는 동네다. 행정구역으로는 봉평동에 속하며 봉숫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산 쪽으로 이어지는 길 주변에 집과 식당, 작은 가게들이 모여 있다.

이름은 미륵산에 있던 봉수대에서 왔다고 전한다. 높은 곳에서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로 먼 곳에 소식을 전하던 것이 봉수다. 오늘날 케이블카가 오르는 산에 바다를 살피고 소식을 전하던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다.

용화사와 미륵산을 찾는 사람들이 오가면서 보리밥과 찜을 파는 식당들이 자리 잡았다. 특히 아귀찜 식당들이 모인 찜 골목으로 알려져 산에 다녀와 끼니를 해결하는 동네로 사랑받았다. 주민들이 이용하는 목욕탕과 미용실 곁에 미술관과 책방이 들어서며 골목을 찾아오는 이유도 늘었다.

전혁림이 그린 통영

통영에서 태어난 전혁림은 고향과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통영의 항구와 갯마을을 즐겨 그린 화가다. 짙은 청색과 독특한 색채로 ‘바다의 화가’라는 이름도 얻었는데, 그가 그린 집과 배, 산과 바다는 사진처럼 놓여 있지 않고 화가가 고른 색과 형태로 다시 구성돼 있다.

전혁림미술관은 2003년 문을 열었으며 건물 외벽에도 작품을 바탕으로 만든 타일이 붙어 있다. 전시장에 들어가기 전, 골목에서부터 그의 그림을 만나는 셈이다.

책을 만들려고 통영에 온 사람들

미술관 가까이에는 출판사 남해의봄날이 운영하는 봄날의책방이 있다. 서울에서 살던 부부가 통영으로 내려와 출판사를 차리고 오래된 주택을 고쳐 책방을 열었으며, 지역 사람들과 지역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드는 일도 이어왔다.

책방은 지역 예술가를 소개하고 마을신문 ‘봉수골 꽃편지’로 이웃들의 소식을 나누기도 했다. 미술관을 찾았다가 책방을 발견하고, 책을 사러 왔다가 식당과 카페에 들르는 사람들이 늘면서 이 골목에 가게를 열고 정착한 이웃들도 더해졌다.

벚나무에 뜨개옷을 입힌 사연

봄 벚꽃으로 알려진 봉수골에는 꽃이 지고 관광객이 줄어드는 계절을 함께 보낼 방법을 궁리한 사람들이 있다. 동네 모임 ‘봉수비전’으로, ‘봉숫골 비수기 전문가’를 줄인 이름이라고 한다. 이들은 동네지도를 만들고 행사를 열며 골목을 찾아올 이유를 함께 마련했다.

가을과 겨울에는 벚나무에 입힐 옷을 함께 떴다. 뜨개질을 잘하는 주민이 다른 이웃에게 방법을 알려주면서 가로수에 입힐 옷이 늘었고, 모자와 목 방한대를 만들어 동네 어르신들에게 전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은 2026년 지역신문에 소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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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동피랑, 마을을 남긴 그림

벽화가 그려진 동피랑 마을의 예전 모습
벽화가 그려진 동피랑 마을의 예전 모습사진: Junho Jung · CC BY-SA 3.0

동쪽 비탈에 자리 잡은 마을

동피랑은 통영 중앙시장 뒤편의 동쪽 언덕에 있는 마을이다. ‘피랑’은 비탈이나 벼랑을 뜻하는 통영 말로, 동피랑은 동쪽 비탈, 서피랑은 서쪽 비탈이라는 뜻이다. 여행지 이름으로 익숙한 말 안에 마을이 들어선 땅의 모양과 방향이 그대로 담겨 있다.

동피랑에는 뱃일을 하던 사람과 섬에서 육지로 나온 사람, 한국전쟁 때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다. 항구와 시장이 가까워 생업을 이어가기 편한 곳이었다. 비탈을 따라 들어선 집 사이의 계단과 골목은 장을 보고 학교에 다니던 주민들의 길이다.

철거 계획 앞에서 찾은 방법

시간이 흐르면서 집은 낡고 좁고 가파른 길 때문에 생활의 불편도 커졌다. 2000년대 중반 통영시는 이 일대를 정비하면서 옛 군사시설인 동포루를 복원하고 주변에 공원을 만들 계획을 세웠는데, 주민들에게는 오래 살던 집을 떠나야 하는 일이었다.

마을을 남길 방법을 찾던 주민과 지역 단체는 벽화에 주목했다. 2007년 푸른통영21 등이 벽화 공모전을 열고 학생을 비롯한 여러 참가자가 담벼락에 그림을 그렸으며, 이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늘면서 동피랑을 보존하자는 의견도 커졌다.

통영시는 이후 마을 전체를 철거하려던 계획을 바꿔 꼭대기 일부에 동포루를 복원하고 나머지 마을을 남겼다. 지금의 동피랑에 주민들의 집과 벽화, 복원한 포루가 함께 있는 것은 이런 선택의 결과다. 유명한 벽화마을이 된 과정에는 집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의 일이 있었다.

그림이 바뀌어도 사람들이 사는 곳

동피랑 벽화는 공모전과 축제를 거치며 새 그림으로 바뀌어 왔다. 예전 사진과 지금의 벽화가 다를 수 있는 이유다. 언덕 위 동포루에서는 시장 지붕 너머 강구안과 통영항이 보인다. 옛 통영성의 포루는 1694년 세워진 시설로, 이순신이 한산도에 머물던 때보다 뒤의 역사다.

그림이 있는 담 안쪽은 여전히 집이고 문과 계단은 주민들의 통로다. 사진을 찍으려고 문 앞에 오래 머물거나 카메라를 집 안으로 향하면 생활에 영향을 준다. 동피랑의 벽화가 사람들이 살던 마을을 남기려는 시도에서 시작됐다는 사연은 지금도 이 골목과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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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서피랑과 북포루

서쪽 언덕과 북쪽 포루

서피랑은 ‘서쪽 비탈’이라는 뜻으로, 박경리가 태어난 동네이자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과 이어진다. 서피랑공원과 99계단, 서포루가 있으며 항구를 건너 동피랑과 통제영 일대를 바라볼 수 있다.

북포루는 옛 통영성을 살피던 북쪽 포루에서 이름이 왔다. 순찰과 경비를 위해 높은 곳에 자리했으며, 지금은 시가지와 항구를 넓게 내려다보는 곳으로 알려졌다. 항구 가까운 두 피랑과 달리 산길을 따로 올라야 한다.

서피랑과 북포루는 이번 확정 코스에 포함하지 않았다. 통영의 지형과 역사를 이해할 주변 장소로 함께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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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밤의 벽화, 낮의 바다

한려수도 케이블카 정상에서 바라본 통영 시가지
한려수도 케이블카 정상에서 바라본 통영 시가지사진: Junho Jung · CC BY-SA 3.0

새 그림을 그리면 옛 벽화는 어디로 갈까

동피랑과 서피랑의 벽화는 새로운 그림이 그려질 때마다 달라져 왔다. 디피랑은 그 과정에서 사라진 벽화들이 밤에 깨어난다는 이야기로 만든 야간 관람 공간이다. 그림이 바뀌는 벽화마을의 특성을 가져와, 옛 그림의 행방을 상상하는 이야기로 이어 붙였다.

남망산공원의 길에 빛과 영상, 음악을 더해 그 이야기를 보여준다. 낮에 담벼락을 채우던 그림을 밤의 미디어아트로 다시 만나는 구성이어서, 동피랑과 서피랑을 소개하는 이야기와도 관계가 있다. 이번 여정에서는 첫날 저녁 식사 뒤의 관람으로 잡아두었다.

케이블카에서 바라보는 섬들

통영케이블카는 미륵산으로 올라가는 동안 통영의 섬과 물길을 높은 곳에서 볼 수 있는 시설이다. 배에서는 주변 섬들이 앞뒤로 겹쳐 보였다면 산 위에서는 그 사이로 바다가 이어지는 모양이 드러난다. 날씨와 시야에 따라 멀리 보이는 범위와 바다의 빛깔도 달라진다.

위쪽 정류장 주변에도 전망을 보는 자리가 있으며, 미륵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케이블카에서 내린 뒤 따로 걸어야 한다. 케이블카 탑승과 정상까지의 산행은 범위가 다른 일정이다. 둘째 날에는 케이블카를 타는 것으로 계획하고, 정상까지 오를지는 당일 아이들의 체력과 탑승 대기시간에 따라 정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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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통영에서 한 끼, 한 입

충무김밥
충무김밥사진: Junho Jung · CC BY 3.0

밥과 반찬을 따로 나누는 충무김밥

충무김밥은 흰밥을 작게 만 김밥에 매콤한 무침과 무김치를 따로 내는 음식이다. 이름의 ‘충무’는 통영 시가지가 충무시로 불리던 때의 지명으로, 도시의 옛 이름이 음식 이름에는 지금도 남아 있다.

배를 타는 사람들이 먹던 음식에서 비롯됐다고 알려져 있으며, 밥과 반찬을 따로 담는 방식은 쉽게 쉬는 것을 막고 나누어 먹기에도 편했다고 한다. 단순한 구성처럼 보여도 항구에서 음식을 팔던 일과 배에서 한 끼를 해결하던 생활이 그 모양을 설명하는 배경이다.

1981년 ‘국풍81’ 행사에 소개된 일은 충무김밥이 전국에 알려지는 계기로 꼽힌다. 지금은 가게마다 무김치의 맛과 무침에 쓰는 재료가 조금씩 다르고, 반찬을 얼마나 맵게 만드는지에도 차이가 있다. 김밥과 반찬을 따로 내는 기본 방식 안에서도 가게별로 맛이 달라진다.

꿀빵, 세탁소 이름이 빵집에 남은 사연

통영 꿀빵은 속을 넣은 반죽을 튀긴 뒤 겉에 달콤한 시럽과 깨를 입힌 간식이다. 전통적인 팥소 외에도 여러 속재료를 넣은 제품이 있으며, 이름에 ‘꿀’이 들어가더라도 가게마다 쓰는 당류와 재료가 달라 모두 벌꿀로 만든 빵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래된 가게인 오미사꿀빵의 이름에는 이웃 가게의 사연이 남아 있다. 한국관광공사가 소개한 창업주 가족의 설명에 따르면 처음에는 빵집 이름이 따로 없어, 사람들이 옆에 있던 오미사세탁소의 이름으로 가게를 불렀다고 한다.

세탁소가 문을 닫은 뒤에도 사람들은 그 이름으로 빵집을 찾았고, 오미사는 결국 꿀빵 가게의 간판으로 남았다. 지금은 음식 이름과 가게 이름이 함께 널리 알려졌지만, 그 시작에는 위치를 설명하려고 옆집 이름을 빌려 부르던 동네 사람들의 말이 있었다.

말린 고구마로 끓이는 빼떼기죽

빼떼기는 고구마를 얇게 썰어 말린 것을 가리키며, 여기에 팥과 콩, 조나 찹쌀 같은 곡물을 넣고 푹 끓인 음식이 빼떼기죽이다. 고구마의 단맛과 곡물의 맛이 섞인 죽으로, 들어가는 곡물과 끓이는 방식은 집과 가게마다 다르다.

말린 고구마를 저장해 두었다가 끓여 먹던 음식은 통영을 비롯한 경남 지역에서 이어져 왔다.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도록 고구마를 말리는 일과, 저장한 재료에 곡물을 더해 한 끼를 마련하는 일이 한 음식에 함께 들어 있다. 통영만의 유일한 음식이라기보다 이 지역에서 오래 먹으며 여행객에게도 알려진 음식이다.

졸복국, 작은 복어로 끓이는 통영의 국

통영에서 복국 이야기를 할 때 자주 등장하는 생선이 졸복이다. 몸집이 작은 이 복어로 끓이는 졸복국에는 무와 미나리, 콩나물 등이 들어가며, 생선과 채소의 맛이 우러난 맑은 국물로 알려져 있다.

통영항 여객선터미널 맞은편 서호시장 주변에는 복국을 내는 식당들이 모여 있다. 새벽부터 뱃일에 나서는 사람과 시장 상인들이 식사를 하던 시장 곁에서, 졸복국은 시락국과 함께 통영의 국물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해장국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곳의 국밥과 생선국에는 이른 시간에 한 끼를 해결해야 했던 항구 사람들의 생활도 담겨 있다.

겨울 통영의 굴과 시장

12월 통영의 먹거리에는 굴을 비롯한 겨울 해산물이 있다. 굴 양식이 발달한 이곳에서는 바다에 굴을 매달아 기르고, 수확한 굴의 껍데기를 깐 뒤 시장과 식당으로 옮긴다. 음식으로 나오는 굴 뒤에는 양식 시설에서의 작업과 육지에서 굴을 손질하는 일이 이어져 있다.

같은 굴도 국밥과 죽에 넣거나 전과 찜으로 만들면 서로 다른 음식이 된다. 중앙시장에서는 생선과 패류, 말린 먹거리까지 함께 팔아, 식당의 메뉴로만 접할 때보다 다양한 재료를 볼 수 있다. 바다에서 얻은 것을 그대로 팔기도 하고 손질하거나 말려 두기도 하는 시장의 모습이다.

서울삼겹살, 고기 곁의 해산물

항남동의 서울삼겹살은 생삼겹살과 대패삼겹살을 주메뉴로 하는 식당이다. 김치와 콩나물, 고사리 같은 반찬을 고기와 함께 불판에 올려 먹는 상차림이 방문기에도 자주 등장하며, 고기를 먹고 난 뒤에는 볶음밥으로 식사를 마무리한다.

고기 곁에 해산물을 놓는다는 점도 눈에 띈다. 레드테이블의 메뉴 소개에는 굴을 따로 추가하는 메뉴가 있고, 방문기에는 새우와 관자, 굴을 삼겹살과 함께 구워 먹은 이야기가 나온다. 다만 곁들인 해산물의 종류는 방문 시기마다 차이가 있어, 이들을 모두 한꺼번에 내는 고정 상차림으로 보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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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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