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려수도 케이블카 정상에서 내려다본 통영항

2026. 12. 19–20 · 함께 떠나는 1박 2일

통영 풍경이
너무 아름다버서
눈물이 날라칸다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백석, 「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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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이라고 발음하면 왠지 파란색이 스며 나오는 것 같다. 잔잔한 바람에 반짝이는 짙푸른 바다를 그대로 소리로 담아낸 것 같은 이름이다.

‘바다의 땅’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도시다. 항구 가까이 시장과 마을이 모여 있고, 배를 타면 육지에서 바라보던 섬으로 들어간다. 높은 언덕에서는 집과 시장 너머로 바다가 보인다. 통영의 풍경을 이야기하다 보면 바다에서 일하고, 그 곁에 집을 짓고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도 함께 따라온다.

백석이 찾아온 항구와 박경리의 고향, 한산도에 남은 수군의 이야기, 봉수골의 책방과 피랑의 골목을 이 안내서에 담았다. 이번 여행에서 찾아갈 곳들과, 그곳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주변 동네의 이야기다. 이름을 알고 나면 다시 눈에 들어오는 풍경도 있다.

01

백석이 찾아온 통영

평안도 청년의 남쪽 여행

백석의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다. 통영에서 태어나거나 오래 살았던 시인은 아니지만, 그는 이 남쪽 항구를 여러 차례 찾아와 같은 제목의 시를 거듭 남겼다. 통영을 좋아했던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백석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 이유다.

그 여행에는 통영 출신 박경련이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백석은 1935년 친구인 소설가 허준의 혼인 축하 자리에서 그녀를 만났다고 전해지며, 이후 통영을 찾아와 시에 ‘란’이라는 이름으로 그리운 사람을 적었다. 사람들의 회고와 연구에 따라 여행의 세부 일정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 무렵의 통영과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이 시에 함께 남아 있다.

배로 반나절 걸리던 길

1936년 1월 23일 발표한 「통영」은 구마산 선창에서 배를 타고 통영으로 들어오는 물길로 시작한다. 시인이 적은 뱃길은 반나절이다. 지금처럼 목적지까지 차로 곧장 갈 수 없던 때, 통영을 찾아오는 데에는 배를 기다리고 바다를 건너는 시간이 필요했다.

시에는 전복과 해삼, 생선과 젓갈, 집집이 말리는 대구가 등장하고, 새벽 거리의 소리와 밤바다의 뱃소리도 담겨 있다. 백석은 바다의 빛깔만큼이나 항구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어떤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지에 관심을 두었다. 안내서 첫머리의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라는 문장도 그런 항구의 생활을 적은 이 시에 나온다.

시인이 다녀간 뒤 항구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어도 배를 기다리는 사람과 바다에서 온 먹거리는 여전히 통영에 있다. 시장에 놓인 생선이나 선착장으로 들어오는 배는 오래된 시와 오늘의 여행이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구체적인 풍경이다.

시 끝에 남은 한 사람의 이름

백석이 남긴 또 다른 「통영」에는 ‘서병직씨에게’라는 헌사가 붙어 있다. 서병직은 그에게 통영의 역사와 풍경을 알려주고 장터와 골목을 안내해 준 인물로 전해진다. 누군가를 만나러 찾아온 도시에서, 백석은 자기 동네를 보여주는 사람도 만난 것이다.

통영의 시를 연애 이야기로만 읽으면 이 이름을 지나치기 쉽다. 그러나 헌사에는 낯선 방문객에게 자기 도시를 소개해 준 사람과 그 친절을 기억한 시인의 관계가 남아 있다. 같은 제목의 「통영」도 발표 시기와 첫 구절을 함께 읽으면, 백석이 이 항구에서 보고 만난 것이 한 가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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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통영이라는 이름

통영항의 거북선 모형
통영항의 거북선 모형사진: Junho Jung · CC BY-SA 3.0

‘통제영’에서 나온 지명

통영이라는 이름은 조선 수군을 지휘하던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나왔다.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세 지역의 수군을 통솔하던 군영을 줄여 통제영이라 불렀고, 그 이름이 오늘날 도시의 이름으로 남았다.

1604년 통제영이 지금의 통영 시가지인 두룡포로 옮겨오면서 항구는 군영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세병관과 관아가 들어서고 주변 능선을 따라 통영성이 세워졌으며, 군사와 장인, 항구에서 생업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이곳에 모였다. 오늘날 시장과 골목이 있는 원도심은 그 군사도시 위에서 오랫동안 이어진 생활의 터전이다.

언덕 위 포루와 항구의 관계

동피랑의 동포루와 서피랑의 서포루, 시내 북쪽의 북포루는 통영성을 살피던 시설과 이어진다. 순찰과 경비를 맡고 군사를 지휘하려면 성과 항구의 움직임을 넓게 볼 수 있어야 했으므로, 포루는 주변을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자리했다.

지금은 여행자들이 항구의 전망을 보러 그 언덕에 오른다. 시장과 바다가 가까이 붙어 있고 그 뒤로 집들이 비탈을 따라 들어선 모습은, 군영을 지키기 위해 고른 자리와 사람들이 살기 위해 택한 자리가 한 도시에 함께 있음을 보여준다. 언덕 위의 전망에도 그곳이 맡았던 일이 있다.

군영을 유지하던 손기술

군영을 유지하는 데에는 배를 타고 싸우는 군사와 더불어 배와 무기를 만들고 고칠 사람,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할 장인들이 필요했다. 통제영의 공방에서는 목공과 금속, 옻칠과 자개 등 여러 분야의 일이 이루어졌고, 그 손기술은 통영의 공예를 설명하는 중요한 배경이 됐다.

한산도의 진영과 지금의 통영 원도심에 있던 통제영은 서로 다른 시기의 장소다. 이순신이 머물던 한산도에서 수군 본영의 역사를 읽는다면, 세병관과 원도심에서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계속된 군영과 도시의 관계를 읽게 된다. 같은 통영 여행 안에 두 시기의 역사가 함께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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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배를 타야 만나는 동네

육지에서 보던 섬으로 들어가기

통영에서는 시내에서도 섬이 보이고 케이블카 전망 사진에도 섬이 가득하지만, 배를 타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멀리서 본 윤곽과는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선착장 뒤로 이어지는 도로와 집, 마을을 오가는 차들이 있는 한산도 역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네다.

이번 배편의 목적지는 제승당이 있는 섬의 한쪽으로, 한산도 전체를 둘러보는 일정과는 범위가 다르다. 섬 안의 여러 마을을 찾아가려면 별도의 이동 시간이 필요하다. 선착장과 제승당 사이를 오가는 동안에도 육지에서 보던 섬의 모습과 섬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방향은 달라진다.

섬 사람에게 배는 어떤 교통수단일까

여행객이 특별한 경험으로 타는 배를 섬 주민은 장을 보거나 병원에 가고 가족을 만나러 육지를 오갈 때 이용한다. 선착장은 여행의 시작점이면서 주민들의 생활에 필요한 교통시설이고, 같은 배 안에도 서로 다른 목적으로 바다를 건너는 사람들이 함께 있다.

배를 이용하는 생활에서는 떠나고 돌아오는 시간이 하루의 움직임을 좌우한다. 볼일을 마쳤어도 다음 배를 기다려야 하고, 바람과 파도가 강하면 예정된 운항도 달라질 수 있다. 한산도를 오가는 배 시간에는 여행자가 정한 관람 시간과 섬 주민의 생활 시간이 함께 맞물려 있다.

풍경 속에 있는 바다의 일터

통영은 어업과 양식업이 발달한 도시로, 이곳의 멸치와 굴은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손을 거쳐 시장과 식당으로 간다. 배에서 보이는 어선과 양식 시설에는 먹거리를 얻고 생계를 이어가는 일이 걸려 있다. 멀리서 본 바다 풍경 안에 실제 작업 공간이 들어 있는 것이다.

사람을 실어 나르는 여객선과 바다에서 일하는 배는 생김새와 움직임이 다르고, 섬의 집들도 선착장과 도로를 따라 모여 있다. 육지에서는 섬에 가려 보이지 않던 해안과 마을을 배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그 차이를 보는 일이 한산도로 건너가는 시간의 한 부분이다.

문어포, 길을 물었다는 포구

한산도 마을 이름에는 이순신의 수군과 임진왜란을 연결하는 이야기가 여럿 전하는데, 문어포도 그중 하나다. 한산대첩에서 패한 일본군이 달아날 길을 물었다고 해서 ‘물을 문(問)’과 ‘말씀 어(語)’를 썼다는 유래가 전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2011년 한산도 주민에게 채록한 설화에도 이 이야기가 나온다. 주민들이 전해 온 이야기이므로 지명이 생긴 당시의 일을 입증하는 문서와는 구분해야 하며, 이순신이 직접 이름을 붙였다는 근거로 볼 수는 없다. 다만 섬 사람들이 한산대첩을 어떤 장소와 연결해 이야기해 왔는지는 알 수 있다.

개미목과 두억개에 전하는 한산대첩

의항은 ‘개미목’이라고도 부른다. 잘록한 땅의 생김새를 개미의 목에 빗댄 풀이에, 한산대첩에서 패한 일본군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는 이야기가 더해져 전한다. 지형을 설명하는 이름과 전투를 기억하는 설화가 한 장소에 겹쳐 있는 사례다.

두억개에는 일본군이 크게 패해 수많은 군사가 죽었다는 전설이 붙어 있으며, 이를 ‘머리 두(頭)’와 ‘억 억(億)’으로 풀이한다. 이름에 들어간 큰 숫자는 전설 속의 과장된 표현으로 읽어야 한다. 실제 전사자 수를 알려주는 기록이나 통계가 지명에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야소와 창동, 수군의 생활과 연결되는 이름

야소는 무기를 만들고 수리하던 곳, 창동은 군량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던 곳으로 풀이되곤 한다. 군사들이 먹을 곡식을 모으고 망가진 무기를 고치는 일도 군영을 유지하는 데 필요했기에, 이런 지명 이야기는 전투를 뒷받침하던 생활과 노동까지 떠올리게 한다.

같은 이름에도 다른 풀이가 전한다. 창동을 군량 창고와 연결하는 설명이 있는가 하면 주민 구술에는 장이 서던 곳이라는 설명도 있어, 지명만으로 옛 시설의 위치와 용도를 확정하기는 어렵다. 여러 유래는 각각 전해지는 이야기로 읽되, 수군이 머물던 섬을 주민들이 어떻게 설명해 왔는지 살펴볼 자료가 된다.

전쟁 유적 앞에 있는 생활의 바다

한산도는 한산대첩과 이순신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수군 본영이 있던 시기의 섬에는 군사와 전투선만 드나든 것이 아니었다. 물자와 식량을 실은 배가 오가고 여러 곳의 소식이 모였으며, 전투가 없는 날에도 군영을 유지하는 일은 계속됐다.

주변 섬과 물길을 끼고 있는 한산도의 자리는 배 위와 산 위에서 서로 다르게 보인다. 첫날에는 바다를 건너 제승당으로 들어가고, 둘째 날에는 미륵산 케이블카에서 섬들이 모여 있는 바다를 내려다보는 여정이다. 가까이 지나온 물길이 주변 바다의 어느 부분인지 높은 곳에서 다시 가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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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제승당, 싸움 사이의 날들

한산도 제승당
한산도 제승당사진: Asfreeas · CC BY-SA 3.0

한산대첩이 먼저, 본영은 그다음

한산대첩은 1592년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의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물리친 해전이다. 배들이 학의 날개처럼 펼쳐지는 학익진으로도 알려져 있다. 한산도에 수군 본영을 둔 것은 그다음 해인 1593년으로, 전투가 벌어진 때와 군영을 옮겨온 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1593년 이순신은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수군을 지휘하는 초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됐고, 한산도는 1597년까지 수군을 지휘하는 본영이었다. 제승당은 한산대첩을 기리는 유적인 동시에, 그 뒤 이곳에서 군사를 훈련하고 물자를 마련하며 군영을 운영했던 시간을 살펴볼 수 있는 장소다.

제승당이라는 이름을 읽어보면

제승당은 ‘승리를 만들어내는 집’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원래 이 자리에는 이순신이 부하들과 작전을 의논하고 업무를 보던 운주당이 있었는데, 운주 역시 계책을 세운다는 뜻을 지닌 이름이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바다와 적의 동태를 살피고 배와 군사를 어떻게 움직일지 논의하던 건물이었다.

운주당은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탔고, 뒤에 영조 때 통제사 조경이 그 자리에 건물을 다시 세우면서 제승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정비와 복원이 이루어져 지금에 이르렀다. 따라서 현재의 건물과 이름에는 이순신이 군영을 이끌던 시기의 역사와 그 자리를 보존하려 했던 후대 사람들의 일이 함께 담겨 있다.

회의하던 곳, 바다를 살피던 곳, 활을 쏘던 곳

경내의 건물들은 비슷한 지붕과 기둥을 갖췄어도 맡은 일이 서로 달랐다. 제승당은 작전을 의논하던 자리와 이어지고, 수루는 바다를 살피는 망루이며, 한산정은 활을 쏘던 곳이다. 충무사는 이순신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군영의 생활과 장군을 기리는 일이 한 유적 안에 함께 있다.

회의에는 사람들이 모일 공간이 필요하고, 경계에는 멀리 보이는 자리가 필요하며, 활쏘기에는 표적을 향해 쏠 수 있는 거리가 필요하다. 건물의 쓰임을 알면 같은 경내에서도 자리를 달리한 이유가 보인다. 수루 밖으로 이어지는 물길과 주변 섬의 위치 역시 바다를 살피던 시설의 역할을 설명해 준다.

지도에서는 선과 이름으로 표시되는 섬들이 수루에서는 실제 높낮이와 간격을 가진 풍경으로 보인다. 제승당으로 들어오며 배에서 바라봤던 바다를 이번에는 육지의 망루에서 마주하는 셈이다. 군영을 어디에 두고 어느 방향을 살필지는 이런 지형과 물길을 고려해야 하는 일이었다.

전투가 없는 날의 군영

이순신의 생애를 큰 전투와 승전 위주로 읽으면 군영에서 보낸 나머지 날들은 지나치기 쉽다. 그러나 수군을 이끄는 동안에는 배를 고치고 무기와 식량을 점검하며, 군사들의 사정과 여러 곳에서 들어오는 소식을 살피는 일도 계속됐다. 전투가 없는 날의 준비가 다음 전투를 치를 수 있게 했다.

운주당의 업무와 한산정의 활쏘기, 수루의 경계는 그렇게 한 군영 안에서 함께 필요했던 일들이다. 제승당 관람은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데 더해, 사람과 배가 오랫동안 머물 수 있도록 군영을 꾸려간 일을 생각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오늘의 유적에는 그 생활을 설명하는 장소들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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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박경리, 고향에 남은 이야기

『토지』를 다 읽지 않았어도

박경리라는 이름 뒤에는 대개 『토지』가 먼저 따라오지만, 기념관의 이야기는 그 긴 소설을 읽었는지와 관계없이 시작할 수 있다. 이곳의 사진과 글, 생활용품이 소개하는 것은 통영에서 태어난 한 사람이 가족을 돌보고 생계를 꾸리며 소설가로 살아간 시간이다.

1926년 통영에서 태어난 박경리는 고향을 떠난 뒤 서울과 원주 등에서 살았고, 그동안에도 통영의 골목과 바다, 그곳 사람들을 작품에 거듭 썼다. 탄생 100주년인 2026년에 찾게 될 이 기념관은 시내의 생가와는 다른 장소로, 산양읍에 2010년 문을 열었다.

한 어머니가 소설가로 살아간 시간

박경리는 한국전쟁 중 남편을 잃었고 어린 아들도 먼저 떠나보냈다. 남은 딸을 키우며 생활을 꾸리던 그는 1955년 단편 「계산」을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작가의 연보에는 작품 발표와 가족의 상실, 생계를 이어가던 일이 함께 적혀 있다.

그가 소설을 쓰던 시간은 가족을 돌보고 먹고사는 일을 해결하던 시간과 떨어져 있지 않았다. 책 한 권이 완성되기까지 원고를 쓰고 고치는 일 외에도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할 생활이 있었고, 기념관에 놓인 사진과 유품은 그 생활의 일부를 보여준다.

오래된 국어사전과 손으로 쓴 원고는 작가가 실제로 사용하던 물건이다. 책등에서 이름으로만 만났던 사람이 어떤 글씨를 썼고 어떤 물건을 곁에 두었는지 보여주기 때문에, 작품의 연대와 제목을 읽을 때와는 다른 구체적인 모습으로 기억에 남는다.

통영을 읽으려면 『김약국의 딸들』

『토지』의 주요 무대가 하동 평사리와 간도 등이라면, 통영 여행과 가까이 이어지는 소설은 1962년에 나온 『김약국의 딸들』이다. 통영을 배경으로 한 집안과 다섯 딸의 삶을 그리며, 가족의 몰락과 엇갈린 욕망, 시대가 바뀌는 동안의 돈과 관계를 다룬다.

작품 속 고향에는 항구의 풍경과 함께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정이 있다. 누가 누구와 혼인하고 어떤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지, 재산과 가족 때문에 어떤 선택을 하는지가 인물들의 삶을 바꾼다. 바다가 가까운 도시의 생활을 작가는 사람 사이의 관계로 풀어냈다.

서피랑을 비롯한 통영 골목이 박경리의 문학과 함께 소개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실제 골목의 모든 집과 길을 소설 속 사건에 하나씩 대응시킬 수는 없지만, 비탈에 모인 집들과 가까운 항구는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해할 배경이 된다. 작가가 거듭 통영을 쓴 데에는 그 풍경 안의 생활도 있었다.

1969년부터 1994년까지, 끝까지 쓰는 일

『토지』는 1969년 연재를 시작해 1994년 완성됐다. 한 작품을 쓰는 동안 작가의 나이와 살던 곳, 세상의 모습까지 달라졌으니, 시작한 원고를 마지막까지 이어가는 일은 오랜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연재의 시작과 완성이라는 두 날짜 사이에 매일 글을 쓰고 고치던 시간이 들어 있다.

손으로 쓴 원고에는 문장을 고친 흔적이 남는다. 완성된 책에서는 한 문장으로 읽히는 대목에도 여러 번의 선택과 수정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기념관에서 만나는 원고와 글씨는 긴 소설의 분량만으로는 짐작하기 어려운 집필의 구체적인 모습을 전한다.

2026년에 달라진 기념관

박경리기념관은 새 단장을 마치고 2026년 4월 다시 문을 열었다. 전시는 작가가 나고 자란 통영과 문학세계, 고향으로 돌아온 삶을 중심으로 구성됐으며, 글과 사진에 영상과 음성을 더해 작가와 작품을 소개한다.

국어사전과 재봉틀, 나비장 같은 생활용품도 전시돼 있다. 글을 쓰기 위해 들여다보던 사전과 일상의 살림에 쓰던 물건들이 함께 놓여 있어, 전시가 소개하는 생애에 생활의 구체적인 모양이 더해진다. 책을 쓰는 일과 하루를 살아가는 일이 한 사람의 삶 안에서 함께 이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품들이다.

묘소로 가는 길

박경리는 2008년 세상을 떠난 뒤 고향 통영에 묻혔고, 묘소는 기념관 인근 언덕에 있다. 전시실에서 연보와 사진을 따라 읽던 생애가 언덕 위의 묘소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서울과 원주 등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작가의 마지막 자리가 다시 통영에 있다는 사실도 이 길에서 생각하게 된다.

묘소로 가는 동안에는 전시실에서 본 물건과 글씨가 조금 다른 의미로 남는다. 사전을 들여다보고 원고를 고치던 일, 가족을 돌보며 생활을 이어가던 일, 고향 사람들을 소설에 거듭 적었던 일들이 한 사람의 생애였다는 점에서다. 언덕을 오르는 길은 그런 삶을 소개하는 전시와 작가가 묻힌 자리를 잇는다.

묘소 방문에는 언덕길을 오가는 시간이 따로 필요하다. 전시 관람과 묘소까지의 걸음은 나누어 생각할 수 있으며, 이번 여행에서도 묘소까지 오를지는 당일 날씨와 아이들의 체력을 보고 정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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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봉수골의 사람들

봉수대가 있던 산 아래

봉수골은 용화사거리에서 미륵산 용화사로 오르는 길을 따라 이어지는 동네다. 행정구역으로는 봉평동에 속하며 봉숫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산 쪽으로 이어지는 길 주변에 집과 식당, 작은 가게들이 모여 있다.

이름은 미륵산에 있던 봉수대에서 왔다고 전한다. 높은 곳에서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로 먼 곳에 소식을 전하던 것이 봉수다. 오늘날 케이블카가 오르는 이 산에는 바다를 살피고 소식을 전해야 했던 시절의 역할도 있었고, 그 기억이 산 아래 동네 이름에 남았다.

산에 다녀와 밥을 먹던 동네

길 끝의 용화사와 미륵산을 찾는 사람들이 오가면서 봉수골에는 보리밥과 찜을 파는 식당들이 자리 잡았다. 특히 아귀찜 식당들이 모인 찜 골목으로 알려져, 산에 다녀와 끼니를 해결하는 동네로도 오래 사랑받았다.

주민들이 이용하는 목욕탕과 미용실도 있어 식사하러 온 손님과 동네 사람들이 같은 골목을 오간다. 여기에 전혁림미술관과 봄날의책방이 자리하면서 그림과 책을 찾아오는 발길도 더해졌다. 등산과 식사, 동네의 일상과 문화 공간이 한 길 주변에서 함께 이어지는 모습이다.

전혁림이 그린 통영

통영에서 태어난 전혁림은 고향과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통영의 항구와 갯마을을 즐겨 그린 화가다. 짙은 청색과 독특한 색채로 ‘바다의 화가’라는 이름도 얻었는데, 그가 그린 집과 배, 산과 바다는 사진처럼 놓여 있지 않고 화가가 고른 색과 형태로 다시 구성돼 있다.

봉수골에 있는 전혁림미술관은 2003년 문을 열었으며, 건물 외벽에도 작품을 바탕으로 만든 타일이 붙어 있다. 전시장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의 그림을 만나는 셈이다. 통영을 소재로 한 그림이 통영의 실제 골목 안에 건물의 모습으로도 자리하고 있다.

책을 만들려고 통영에 온 사람들

미술관 가까이에는 출판사 남해의봄날이 운영하는 봄날의책방이 있다. 서울에서 살던 부부가 통영으로 내려와 출판사를 차리고 오래된 주택을 고쳐 책방을 열었으며, 지역 사람들과 지역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드는 일도 이어왔다.

책방은 지역 예술가를 소개하고, 마을신문 ‘봉수골 꽃편지’를 만들어 이웃들의 소식을 나누기도 했다. 여행자에게는 잠깐 들르는 서점이지만 동네에서는 서로의 소식을 전하고 만나는 곳이기도 한 것이다. 미술관을 찾았다가 책방을 발견하고 책을 사러 왔다가 식당과 카페에 들르는 사람들이 늘면서, 이 골목에 가게를 열고 정착한 이웃들도 더해졌다.

벚나무에 뜨개옷을 입힌 사연

봄 벚꽃으로 알려진 봉수골에는 꽃이 지고 관광객이 줄어드는 계절을 함께 보낼 방법을 궁리한 사람들이 있다. 동네 모임 ‘봉수비전’으로, ‘봉숫골 비수기 전문가’를 줄인 이름이라고 한다. 이들은 동네지도를 만들고 행사를 열며 골목을 찾아올 이유를 함께 마련했다.

가을과 겨울에는 벚나무에 입힐 옷을 함께 떴다. 뜨개질을 잘하는 주민이 다른 이웃에게 방법을 알려주면서 가로수에 입힐 옷이 늘었고, 모자와 목 방한대를 만들어 동네 어르신들에게 전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은 2026년 지역신문에 소개됐다.

벚꽃이 피는 시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꽃이 없는 계절에도 함께 할 일을 찾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동네의 식당과 책방, 미술관을 소개하는 이야기 곁에 이웃들이 모여 지도를 만들고 뜨개질을 했다는 사연이 더해진다. 봉수골에서 이어지는 생활을 보여주는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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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동피랑, 마을을 남긴 그림

벽화가 그려진 동피랑 마을의 예전 모습
벽화가 그려진 동피랑 마을의 예전 모습사진: Junho Jung · CC BY-SA 3.0

동쪽의 비탈이라는 이름

동피랑은 통영 중앙시장 뒤편의 동쪽 언덕에 있는 마을이다. ‘피랑’은 비탈이나 벼랑을 뜻하는 통영 말로, 동피랑은 동쪽 비탈, 서피랑은 서쪽 비탈이라는 뜻이다. 여행지 이름으로 익숙한 말 안에 마을이 들어선 땅의 모양과 방향이 그대로 담겨 있다.

시장 가까운 언덕에 집들이 모여 있고 그 사이로 계단과 골목이 이어진다. 아래쪽에서는 담벼락의 그림이 먼저 눈에 들어오지만, 높이 오를수록 시장 지붕 너머로 강구안과 통영항이 보인다. 벽화와 항구의 전망이 이 마을을 찾는 사람들에게 함께 알려진 이유다.

항구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집

동피랑에는 뱃일을 하던 사람과 섬에서 육지로 나온 사람, 한국전쟁 때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다. 항구와 시장이 가까워 일터를 오가고 생업을 이어가기 편한 곳이었으므로, 바다와 관계를 맺고 살아온 여러 사람들이 이 언덕에 집을 마련했다.

집들은 비탈의 모양에 맞춰 들어섰고, 집과 집 사이를 오가며 길도 이어졌다. 지금 여행객이 그림을 찾아 사진을 찍는 골목은 주민들이 장을 보고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던 길이기도 하다. 동피랑의 좁은 길과 계단에는 벽화가 그려지기 전부터 계속된 마을의 생활이 있다.

철거 계획 앞에서 찾은 방법

시간이 흐르면서 집은 낡고 좁고 가파른 길 때문에 생활의 불편도 커졌다. 2000년대 중반 통영시는 이 일대를 정비하면서 옛 군사시설인 동포루를 복원하고 주변에 공원을 만들 계획을 세웠는데, 주민들에게는 오래 살던 집을 떠나야 하는 일이었다.

마을을 남길 방법을 찾던 주민과 지역 단체는 벽화에 주목했다. 2007년 푸른통영21 등이 벽화 공모전을 열고 학생을 비롯한 여러 참가자가 담벼락에 그림을 그렸으며, 이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늘면서 동피랑을 보존하자는 의견도 커졌다.

통영시는 이후 마을 전체를 철거하려던 계획을 바꿔 꼭대기 일부에 동포루를 복원하고 나머지 마을을 남겼다. 지금의 동피랑에 주민들의 집과 벽화, 복원한 포루가 함께 있는 것은 이런 선택의 결과다. 유명한 벽화마을이 된 과정에는 집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의 일이 있었다.

그림이 바뀌는 골목

동피랑의 벽화는 공모전과 축제를 거치며 새로운 그림으로 바뀌어 왔다. 처음 그린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는 방식과는 달리 같은 골목에 다른 그림이 들어서기도 하므로, 예전 사진에 담긴 벽화와 지금 현장에서 보는 그림이 서로 다를 수 있다.

담벼락을 따라 이어지는 그림 가운데는 동물과 배, 바다처럼 익숙한 소재도 있다. 누구는 그림의 모양을 보고, 누구는 그 그림 뒤로 보이는 항구에 눈길을 줄 것이다. 한 장소에서 벽화와 마을의 실제 풍경을 함께 보게 된다는 점이 동피랑 골목의 특징이다.

동포루에서는 무엇이 보일까

언덕 위 동포루는 옛 통영성의 동쪽을 살피던 포루를 복원한 곳이다. 통영성의 세 포루가 세워진 해는 조선 후기인 1694년으로, 한산도에서 이순신이 군영을 이끌던 때보다 뒤의 일이다. 같은 여행에서 만나는 군사 유적이어도 그 시기는 구분된다.

시장과 가까운 전망 자리에서는 강구안이 보이고, 더 높은 곳에서는 항구 주변으로 시야가 넓어진다. 바다와 시장, 비탈의 집들이 얼마나 가까이 모여 있는지도 드러난다. 바다를 오가는 배를 보던 시선과 항구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이곳에서는 서로 이어진다.

방문객이 늘어난 뒤에도

방문객이 늘면 가게의 손님도 많아지지만,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서는 소음과 사생활 문제가 함께 생긴다. 동피랑에서도 여행객을 맞는 일과 주민이 계속 살 수 있는 동네를 유지하는 일이 어떻게 함께 가능할지 고민이 이어져 왔다.

벽화가 있는 담 안쪽은 여전히 집이고, 골목의 문과 계단은 주민들이 실제로 드나드는 통로다. 사진을 찍으려고 문 앞에 머물거나 카메라를 집 안으로 향하면 그 생활에 영향을 준다. 동피랑의 벽화가 처음부터 사람들이 살던 동네를 남기려는 시도였다는 점은 지금의 방문에서도 중요한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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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피랑과 북포루

박경리가 태어난 서피랑

서피랑은 ‘서쪽 비탈’이라는 뜻의 오래된 지명으로, 박경리 작가가 태어난 동네이자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과도 이어지는 곳이다. 산양읍의 기념관에서 작가의 생애와 작품을 소개한다면, 이곳에는 작가가 나고 자란 시가지의 골목과 지형이 있다.

서피랑공원과 99계단, 서포루가 이 일대를 대표하는 장소다. 서포루에서는 통영항과 강구안, 동피랑과 통제영 일대가 내려다보인다. 동피랑에서 보던 항구를 다른 쪽 언덕에서 바라보는 자리여서, 항구 주변에 모인 마을과 시설들의 위치를 함께 가늠하기 좋다.

같은 바다를 다른 높이에서

골목에서는 담과 집이 시야를 가리지만 언덕 위에서는 그 집들이 놓인 자리가 보인다. 시장에서 바다까지가 얼마나 가까운지, 산과 바다 사이에 도시는 어떤 모양으로 들어섰는지 같은 것들이다. 항구와 시가지의 관계를 살펴보는 데에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도움이 된다.

서피랑에는 전망을 보는 자리와 오래된 주택 사이의 계단길이 함께 있다. 공원과 포루를 찾아가는 길이 주민들의 집으로 이어지는 길과 만나는 것이다. 지도를 볼 때에도 서피랑공원과 서포루, 99계단을 같은 한 점으로 보기보다 서로 이어지는 구간으로 이해하면 동네의 모양을 알기 쉽다.

북포루는 왜 북쪽에 있을까

북포루는 통영 시내 북쪽 산에 있으며, 이름도 옛 통영성을 살피던 북쪽 포루에서 왔다. 동쪽과 서쪽, 북쪽의 높은 곳에 포루를 둔 것은 순찰과 경비를 맡고 때로 군사를 지휘하기 위해 넓은 시야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통영의 시가지와 항구를 넓게 내려다보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항구 가까운 동피랑과 서피랑에서 보는 마을의 모습과, 산 위 북포루에서 보는 도시의 범위에는 차이가 있다. 북포루는 별도로 산길을 올라야 하는 곳으로, 서피랑과 함께 이번 여정의 확정 방문지에는 넣지 않고 통영을 이해할 주변 장소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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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벽화, 낮의 바다

한려수도 케이블카 정상에서 바라본 통영 시가지
한려수도 케이블카 정상에서 바라본 통영 시가지사진: Junho Jung · CC BY-SA 3.0

새 그림을 그리면 옛 벽화는 어디로 갈까

동피랑과 서피랑의 벽화는 새로운 그림이 그려질 때마다 달라져 왔다. 디피랑은 그 과정에서 사라진 벽화들이 밤에 깨어난다는 이야기로 만든 야간 관람 공간이다. 그림이 바뀌는 벽화마을의 특성을 가져와, 옛 그림의 행방을 상상하는 이야기로 이어 붙였다.

남망산공원의 길에 빛과 영상, 음악을 더해 그 이야기를 보여준다. 낮에 담벼락을 채우던 그림을 밤의 미디어아트로 다시 만나는 구성이어서, 동피랑과 서피랑을 소개하는 이야기와도 관계가 있다. 이번 여정에서는 첫날 저녁 식사 뒤의 관람으로 잡아두었다.

케이블카에서 바라보는 섬들

통영케이블카는 미륵산으로 올라가는 동안 통영의 섬과 물길을 높은 곳에서 볼 수 있는 시설이다. 배에서는 주변 섬들이 앞뒤로 겹쳐 보였다면 산 위에서는 그 사이로 바다가 이어지는 모양이 드러난다. 날씨와 시야에 따라 멀리 보이는 범위와 바다의 빛깔도 달라진다.

위쪽 정류장 주변에도 전망을 보는 자리가 있으며, 미륵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케이블카에서 내린 뒤 따로 걸어야 한다. 케이블카 탑승과 정상까지의 산행은 범위가 다른 일정이다. 둘째 날에는 케이블카를 타는 것으로 계획하고, 정상까지 오를지는 당일 아이들의 체력과 탑승 대기시간에 따라 정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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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에서 한 끼, 한 입

충무김밥
충무김밥사진: Junho Jung · CC BY 3.0

밥과 반찬을 따로 나누는 충무김밥

충무김밥은 흰밥을 작게 만 김밥에 매콤한 무침과 무김치를 따로 내는 음식이다. 이름의 ‘충무’는 통영 시가지가 충무시로 불리던 때의 지명으로, 도시의 옛 이름이 음식 이름에는 지금도 남아 있다.

배를 타는 사람들이 먹던 음식에서 비롯됐다고 알려져 있으며, 밥과 반찬을 따로 담는 방식은 쉽게 쉬는 것을 막고 나누어 먹기에도 편했다고 한다. 단순한 구성처럼 보여도 항구에서 음식을 팔던 일과 배에서 한 끼를 해결하던 생활이 그 모양을 설명하는 배경이다.

1981년 ‘국풍81’ 행사에 소개된 일은 충무김밥이 전국에 알려지는 계기로 꼽힌다. 지금은 가게마다 무김치의 맛과 무침에 쓰는 재료가 조금씩 다르고, 반찬을 얼마나 맵게 만드는지에도 차이가 있다. 김밥과 반찬을 따로 내는 기본 방식 안에서도 가게별로 맛이 달라진다.

꿀빵, 세탁소 이름이 빵집에 남은 사연

통영 꿀빵은 속을 넣은 반죽을 튀긴 뒤 겉에 달콤한 시럽과 깨를 입힌 간식이다. 전통적인 팥소 외에도 여러 속재료를 넣은 제품이 있으며, 이름에 ‘꿀’이 들어가더라도 가게마다 쓰는 당류와 재료가 달라 모두 벌꿀로 만든 빵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래된 가게인 오미사꿀빵의 이름에는 이웃 가게의 사연이 남아 있다. 한국관광공사가 소개한 창업주 가족의 설명에 따르면 처음에는 빵집 이름이 따로 없어, 사람들이 옆에 있던 오미사세탁소의 이름으로 가게를 불렀다고 한다.

세탁소가 문을 닫은 뒤에도 사람들은 그 이름으로 빵집을 찾았고, 오미사는 결국 꿀빵 가게의 간판으로 남았다. 지금은 음식 이름과 가게 이름이 함께 널리 알려졌지만, 그 시작에는 위치를 설명하려고 옆집 이름을 빌려 부르던 동네 사람들의 말이 있었다.

말린 고구마로 끓이는 빼떼기죽

빼떼기는 고구마를 얇게 썰어 말린 것을 가리키며, 여기에 팥과 콩, 조나 찹쌀 같은 곡물을 넣고 푹 끓인 음식이 빼떼기죽이다. 고구마의 단맛과 곡물의 맛이 섞인 죽으로, 들어가는 곡물과 끓이는 방식은 집과 가게마다 다르다.

말린 고구마를 저장해 두었다가 끓여 먹던 음식은 통영을 비롯한 경남 지역에서 이어져 왔다.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도록 고구마를 말리는 일과, 저장한 재료에 곡물을 더해 한 끼를 마련하는 일이 한 음식에 함께 들어 있다. 통영만의 유일한 음식이라기보다 이 지역에서 오래 먹으며 여행객에게도 알려진 음식이다.

통영의 대표 먹거리로 회와 해산물이 먼저 떠오르더라도 섬과 바다 가까이 사는 사람들이 늘 바다에서 난 것만 먹었던 것은 아니다. 밭에서 기른 고구마와 콩, 여러 곡물로 끓이는 빼떼기죽은 이 지역 식탁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졸복국, 작은 복어로 끓이는 통영의 국

통영에서 복국 이야기를 할 때 자주 등장하는 생선이 졸복이다. 몸집이 작은 이 복어로 끓이는 졸복국에는 무와 미나리, 콩나물 등이 들어가며, 생선과 채소의 맛이 우러난 맑은 국물로 알려져 있다.

통영항 여객선터미널 맞은편 서호시장 주변에는 복국을 내는 식당들이 모여 있다. 새벽부터 뱃일에 나서는 사람과 시장 상인들이 식사를 하던 시장 곁에서, 졸복국은 시락국과 함께 통영의 국물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해장국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곳의 국밥과 생선국에는 이른 시간에 한 끼를 해결해야 했던 항구 사람들의 생활도 담겨 있다.

겨울 통영의 굴과 시장

12월 통영의 먹거리에는 굴을 비롯한 겨울 해산물이 있다. 굴 양식이 발달한 이곳에서는 바다에 굴을 매달아 기르고, 수확한 굴의 껍데기를 깐 뒤 시장과 식당으로 옮긴다. 음식으로 나오는 굴 뒤에는 양식 시설에서의 작업과 육지에서 굴을 손질하는 일이 이어져 있다.

같은 굴도 국밥과 죽에 넣거나 전과 찜으로 만들면 서로 다른 음식이 된다. 중앙시장에서는 생선과 패류, 말린 먹거리까지 함께 팔아, 식당의 메뉴로만 접할 때보다 다양한 재료를 볼 수 있다. 바다에서 얻은 것을 그대로 팔기도 하고 손질하거나 말려 두기도 하는 시장의 모습이다.

회로 먹는 재료와 국을 끓이는 재료, 말려 두었다가 쓰는 재료가 한 시장에 모인다. 백석이 통영의 시에 적었던 생선과 젓갈, 집집이 말리던 대구도 이런 항구의 먹거리와 관계가 있다. 시가 쓰인 때와 지금의 시장은 달라졌지만, 바다에서 온 재료를 여러 방식으로 먹는 생활은 계속된다.

서울삼겹살, 고기 곁의 해산물

항남동의 서울삼겹살은 생삼겹살과 대패삼겹살을 주메뉴로 하는 식당이다. 김치와 콩나물, 고사리 같은 반찬을 고기와 함께 불판에 올려 먹는 상차림이 방문기에도 자주 등장하며, 고기를 먹고 난 뒤에는 볶음밥으로 식사를 마무리한다.

고기 곁에 해산물을 놓는다는 점도 눈에 띈다. 레드테이블의 메뉴 소개에는 굴을 따로 추가하는 메뉴가 있고, 방문기에는 새우와 관자, 굴을 삼겹살과 함께 구워 먹은 이야기가 나온다. 다만 곁들인 해산물의 종류는 방문 시기마다 차이가 있어, 이들을 모두 한꺼번에 내는 고정 상차림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번 여행의 식탁

이번 여정의 첫날 점심은 배편에 따라 충무김밥 또는 송이복국으로 정할 계획이다. 저녁 식사는 서울삼겹살로 잡았고, 둘째 날에는 봉수골 옛날생각의 팥칼국수와 가까운 부엔의 빵이 일정에 들어 있다.

이 안내서의 음식 이야기는 그 식사 장소들에 더해 통영에서 오래 먹어온 것들을 소개한다. 배에서 먹던 김밥과 옆집 세탁소의 이름을 얻은 꿀빵, 저장한 고구마로 끓이는 죽은 서로 다른 생활에서 나왔다. 같은 도시의 먹거리 안에도 항구와 동네 가게, 밭과 겨울 살림의 사정이 함께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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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1박 2일

첫째 날 · 한산도와 통영의 밤

2026년 12월 19일 토요일부터 20일 일요일까지, 열네 명이 차량 두 대로 함께하는 통영 여행이다. 첫날의 큰 일정은 한산도 제승당과 저녁 디피랑이며, 청도 출발은 오전 8시 30분으로 잡았다.

통영항에서 한산도행 배를 타기 전 점심은 배편에 따라 충무김밥을 준비하거나 터미널 앞 송이복국에서 먹는 두 가지 안을 두고 있다. 한산도에서 돌아온 뒤 저녁 식사 전까지의 추가 일정은 아직 미정이다. 저녁은 서울삼겹살, 식사 뒤에는 디피랑을 관람하는 순서이며, 숙소는 독채 두 채를 예약한 미월스테이다.

둘째 날 · 작가의 고향에서 동네 점심까지

둘째 날은 오전 10시 숙소 출발을 기준으로 박경리기념관, 통영케이블카, 봉수골의 순서로 잡았다. 점심은 옛날생각의 팥칼국수로 정하고, 가까운 부엔에 들르는 것으로 통영 일정을 마무리한 뒤 청도로 돌아오는 계획이다.

각 장소의 위치와 네이버 지도는 이야기 끝의 방문 메모에 모았다. 서피랑과 북포루는 이번 여행의 확정 방문지에 포함하지 않았으며, 통영의 역사와 지형을 이해할 수 있는 주변 장소로 함께 소개한다.

이동 순서 한눈에 보기

1일차: 08:30 청도 출발 → 통영항·점심 → 한산도 제승당 왕복 → 서울삼겹살 → 디피랑 → 미월스테이

2일차: 10:00 숙소 출발 → 박경리기념관 → 통영케이블카 → 봉수골 옛날생각·부엔 → 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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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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